writing/yearning

여름의 너

순애_ 2024. 9. 9. 14:49

지난 여름에 봤던 능소화가 여전히 내 눈동자에 박혀있는데 여름은 나를 한참 앞서갔다 지난 여름, 이 더위가 채 가시기 전에 기필코 유서를 완결할 거라 마음 먹어놓고는 아직까지도 완성해내지 못 했는데 몇 밤 지나면 다음 여름이 돌아온단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지났단다 내가 가만히 여름을 떠올리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구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유난히 무더웠던 그 해 여름의 열기를 나는 여전히 기억하는데 말이다

권태로운 여름은 틈 없이 다른 꿈을 꾸게 만들었고 적막한 여름은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을 심었다 고요한 여름은 혼자인 게 두려워 사랑을 갈구하게 만들곤 했다 나를 괴롭히는 무수한 여름 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사실 너 없는 여름이었다는 것을 너는 알 턱이 없었다 어쩐지 너무 덥더라니, 그 해의 여름은 사랑을 무뎌지게 만들 만큼 무더웠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다음 주에도 다음 달에도, 계절은 계속 여름이라는 사실에 가끔은 숨이 막혀 눈물이 날 정도였다 자주 아팠다 여름은 왜 이리 긴 거냐며 원망하기도 했다

너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그리움은 삶을 다시 다짐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 또한 너로 인해 그랬다 다음 여름에는, 다음 여름에는 정말 너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겨울마다 나를 살아가게 만들곤 했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까닭의 전부다 나 이제 와 말하지만 사실 너를 그리워하며 사는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대는 접어두기로 했다 더 이상은 너를 그리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는 나의 청춘의 의미도 여름의 뜻도 전부 네가 아니게 될 거다

나는 여름을 사랑하지만 종종 여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이제는 여름을 완전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겠다 그래, 여름은 애증이다 어쩌면 나는 여름이 아닌 너를 미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여름에 눈이 내리는 곳에서 살고 싶다 여름인지 겨울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곳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눈이 내리면, 나는 지금이 여름임을 자각하게 되겠지 사실 내가 여름을 이토록 오래 그리워하게 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