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또 사랑
언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지고, 맞춰가고, 지지고 볶다가, 이별까지 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 삶이 지나치게 길었다. 그럭저럭 버틸만했던 일상들이 갑자기 열을 받아 늘어진 테이프처럼 축 처져 미지근한 소릴 내는 거다. 가뜩이나 지겨운 삶이 기한도 없이 늘어나 영영 나의 메마른 감정을 고문할 것만 같았다.
사랑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사랑 없는 삶이라니. 하고 되뇌면 갑자기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생소해진다. 사랑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다시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음, 이젠 그것마저도 생소하다. 영 까마득하니 자신이 없는 거다. 과도기란 그런 법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온전히 머무를 수가 없다. 그래서 괴로운 거지. 기약 없는 미래를 기약해야 하므로. 그래도 아직 따듯한 곳이 한군데 정도는 남아 있진 않을까 기대하면서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다. 그럴수록 애꿎은 목울대만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이십 대의 불같던 감정들은 진작에 소진되어 사라졌지만, 아직 타고 남은 것이 몸의 한구석 어떤 부분엔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온기라곤 이제 그런 것밖에 없는 건가. 과거에 머무르는 온기를 끌어 다 쓰는 거 이젠 한계다 싶었다. 이것마저 포기해버리면 나는 정말로 사랑 없는 삶에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을 텐데.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볕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옆자리를 돌아봤는데 그 애가 있었다. 아, 맞다. 나 연애하기로 했지.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 애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톱니바퀴처럼 틈 없이 맞물려 잡으면서 나보다 뜨거운 체온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첫눈은 언제쯤 오려나, 이번 주말엔 뭘 하지, 다음 주말엔 또 뭘하지, 이번 겨울엔 한번쯤 여름 나라로 여행을 가면 좋겠는데, 그 전에 일단 제주도 먼저 다녀오고. 아, 그래. 제주도에 가서 참치회를 먹어야겠다. 가만, 근데 얘가 회를 좋아하던가? 얘가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 나도 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구나. 같은 걸 차례로 생각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서로 알아갈 게 많단 사실, 그 사실이 별로 싫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알아갈 시간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누군갈 좋아하는 일은 그렇다. 귀찮고 지난하게만 느꼈던 그 모든 과정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바뀌는. 모든 상황을 낭만의 장치로 취급해버릴 것. 그 다짐은 그 애를 만나고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