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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parting

잘 가라고는 못하지만

by 순애_ 2024. 11. 28.

새벽의 공기와 같았다. 가끔 새벽의 공기 마시는 것을 즐겼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반쯤 빼꼼 내민 채로 스읍하고 들이마시면 우울한 새벽의 시원함이 폐를 찌른다.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마주하고 있다. 투박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내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네 모습이 새벽의 공기 같다. 그 와중에 네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걸까.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파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답일까. 꾹 다문 일자 입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도 이내 힘주어 입술을 꾹 깨물고 단단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몇 년을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건지, 일자 입은 또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 건지들 마음을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끝까지 답답하니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챙겨야 했을 뿐이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나를 떠나간 그 모든 것들이 하찮은 애정이었길,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니까. 나는 분명 허투루 쏟은 애정은 단 한 개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래서 날 사랑하냐고 물었어야 했다.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질문은 입안을 맴돌다 분노가 되었다. 남은 애정은 애증이 되었고 남겨진 이의 감정 정리는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단지 조금 더 똑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만 들었을 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힌다. 새파란 한숨이 잇새로 흘러나온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역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었다. 지긋이 눈을 감는다. 무어라 더 말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주워 물었다. 찰칵찰칵 마찰음 소리가 거슬렸고 이내 희뿌연 연기만이 시야에 가득 찰 뿐이었다. 소리 없이 다가왔다 소리 없이 사라졌다. 꼬나물었던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려왔고 연기는 점차 사라졌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후덥지근한 더위가 서서히 가시며 그렇게 너는 여름처럼 사라졌다.

우산을 질질 바닥에 끌고 가는 너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나도 너에게서 등을 돌렸다. 드드득 거리는 우산 끌리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나서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후련함. 어쩌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동시에 그동안 응어리 쳤던 것들이 순서 없이 뒤죽박죽 섞여 쏟아지는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후련함도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눈치 없는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후드둑 떨어진다.

사랑했고 사랑했었다. 더 이상의 어떤 말도 덧붙이거나 덜어내지 못한다. 변함없는 사실이었고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잘 가라는 인사를 하지 못한 걸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잘 가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도 이 감정을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너보다 두 박자 늦게 자리를 뜨는 법을 배웠고, 자리를 뜨기 전 네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면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하는 법을 배웠다. 여전히 잘 가라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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