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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2022

20221026

by 순애_ 2024. 8. 9.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어리석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에 관해 우리는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수만 있을 뿐이다.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어차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란 거,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의 범주 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게 명백하니까. 그러므로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같은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최소한의 이해를 동반하지 못하는 공감은 좀 폭력적이라고 여긴다. 러닝머신 위에서 42.195km를 달리는 것과 실제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이 완벽히 다른 것처럼, 경험해보지 못한 괴로움과 나 사이엔 넘겨짚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런 연유로 그 사람이 내게 건넨 위로는 러닝머신 위에서 하는 헛발질과 비슷한 거였다. 그러므로 나는 동감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말의 위로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한 것이다. 그는 본인의 경험에 빗대어 나의 괴로움을 속단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내가 생각보다 그를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 태연한 체 굴지만, 며칠 밤낮으로 앓았다는 것, 함께 하고 싶은 미래를 많이 그렸다는 것. 나는 이것들을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애써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가진 괴로움의 형태를 명확히 인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없어야 했다.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괴로움에도 몫이 있다면, 그냥 짊어지면 될 일이었다. 구태여 타인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하다. 이해받지 못해 괴로울 일도, 공감해주지 못해 비난받을 일도 없이 그저 주어진 만큼만 힘들면 될 일이니까.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허공만 맴도는 시선이나, 조건반사 같은 동정은 기만이라고 느낀다.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나누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나누는 쪽에서 좀처럼 책임을 지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쉽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어지간해선 이해하는 척도 하질 않는다. 이것이 나와 그가 가진 견해의 차이였다. 그 사람의 태도를 생각하면서,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나도 뭔가를 말해줬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괜찮냐고 되묻는다거나 하는 것들. 언젠가의 일을 떠올린다. 일방적인 분노를 고스란히 얻어맞고, 이해를 강요받은 날. 일정분량의 원망은 응당 치러야 하는 값으로 느껴지지만, 이해는 얘기가 좀 다르다. 내가 그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하는 것은 명백한 기만이다. 좀 곤혹스럽다고 느낀다. 속 편하자고 착한 인간인 체하면서 한때 좋아했던 사람을 기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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