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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눈 오는 소리

by 순애_ 2024. 9. 17.

겨울에 삿포로에 가봤냐는 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고 너는 호박색 눈을 빛내며 그곳은 너무 하얘서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곳 같다고 했다 또 그곳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나는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눈이 내릴 때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지만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냥 믿기로 한다 네가 어느 곳에는 사계절 내내 능소화가 피어있다고 말해도 나는 그걸 믿을 거다 어떤 나라에는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린다고 말해도 어떤 도시에는 매일 비가 그치지 않는다고 말해도 나는 네가 말한 것이니 그냥 믿기로 했다

나는 가끔 서운함을 몰래 삼키는 날이면 말 없이 자고 있는 네 손을 만지작거릴 때가 있다 너의 청춘의 의미도 나일 때가 있는지 혼자 가늠해보곤 한다 내가 스물 다섯에 뒤를 돌아보아도 여전히 네가 그 자리에 있을지 상상해보곤 한다 너에게 사랑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길래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만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그런 무의미한 생각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이면 꼭 네게 네가 말한 그런 곳에 나도 데려가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너는 늘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나도 안다 그런 곳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것 또한 그냥 믿기로 한다

언젠가는 너와 함께 능소화가 만개한 숲 속에서 춤을 추고 싶다고 말했다 너는 그런 곳이 있냐고 했다 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숲에는 능소화가 피지 않는다 아, 나는 그제서야 네가 왜 나에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늘어 뜨려놓았는지 깨달았다 너는 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기 전부터 이미 계획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심장한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너의 말과 표정들은 계속 내 옆에 있어줄 수 없는 네가 가진 죄책감이었을 거다 가끔 나 때문에 살고 싶었겠지만 또 그래서 죽고 싶었겠지 이제는 안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봤을지

나는 보지 못 했지만 며칠 전 눈이 내렸단다 너도 눈을 봤을까 문득 궁금함과 동시에 너 또한 내가 눈을 봤을까 궁금해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일전에 네가 말했던 눈 내리는 소리를 상상해보곤 했다 나는 가끔 길을 잃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이 버거울 때가 내게도 종종 있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런 때에는 너의 온기조차 차갑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너 또한 나를 버린다면 나는 진짜 죽어야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런 나의 방황에 네가 함께 해준다면 그건 더 이상 방황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했다

요즘은 전만큼 자주 펜을 잡지 않는다 여름이 지나가니 무기력해졌나보다 그럴 때면 여름에 썼던 글들을 정독한다 읽다 보면 서글퍼진다 겨울의 나는 그런 글을 쓸 수가 없다 서글퍼지면 또 다시 눈 내리는 소리를 상상한다 그러다 문득 우리 삿포로에 가기로 하지 않았나 생각이 났다 그래 맞다 그랬지 혼자 삿포로에 갔다가 우연히 너를 마주한다면 좋겠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한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삿포로에서 너를 마주한다면 너와 함께 눈밭에 손 잡고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있잖아 나는 여전히 종종 밋밋하고 버거운 삶을 산다 무색무취의 삶 말이다 근데 또 있잖아 너와 함께 했던 여름을 떠올리면 내 주위가 온통 푸른 색이 된다 신기하지 네가 나한테 얼마나 사랑의 의미였는지를 나는 이제야 알게 됐다 몇 번의 여름이 가고 또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다음 여름에는 네가 다시 올까 기대를 한다 다음 여름에는 눈이 내리는 곳에 가자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자 나는 내가 스물다섯이 되기 전에 꼭 여름에 너와 함께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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