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렸어도 정신없는 세상이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욱 애처롭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마저 애처롭게 만든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걷는다. 좁은 골목 틈 사이로 들어가 말라비틀어진 자국을 슥슥 닦아본다. 코 끝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모양새가 퍽 웃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새카만 판다 꼴은 면했으니까 최고로 웃길 뻔한 모양새는 면했다. 자국을 닦아내다 말고 스멀스멀 떠오르는 생각에 스멀스멀 또다시 웃겨지려 한다. 입술을 일 자로 꾹 다물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이러면 나오려다가도 도로 쏙 들어간다던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 따위라고 궁시렁거리면서도 곧잘 따라 해본다. 고개를 쳐들자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양옆으로 줄줄 샌다. 그럼 그렇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이놈의 망할 것은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지가 않는다. 슥슥 닦아내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벅벅 닦아내기 바쁘다. 벌겋게 부어오르는지도 모르고.
거지 같은 세상. 더러운 세상. 퉤퉤. 시작점이 비슷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내 머리 위에 있고 나보다 늦게 출발하던 이들이 어느새 성공을 앞두고 있다. 누구는 걷고 누구는 뛰는데 나만 늘 제자리걸음. 이것마저 걸음이지 하면서도 거울에 비친 나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다들 처음 사는 인생이라 꽤나 힘들 텐데 왜 유독 나만 더 힘들게 느껴지는지. 성공이란 것은 굳이 사회적으로 칭하는 잣대에 적합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면 성공한 것이라는데 나는 아마 그 무엇도 성공하지 않은 상태. 마음이 편하자니 현실이 버겁고 현실에 매달리 자니 마음이 괴로운.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건 죽을 만큼 괴로워야 가능한 모순.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실해진다. 사람이 나쁜 건 줄 모르고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의지가 약해서도 더더욱 아니다. 기댈 곳이 없어서, 너무 괴로운데 위로받을 곳이 없어서, 그래서 알면서도 하는 거다. 도와달라고 자존심 구겨가며 절실하게 매달렸는데도 돌아오는 건 정중한 거절도 아니고 비아냥대는 조롱이라서. 그 꼴을 당하느니 그냥 이렇게 앓다 죽으려고 돌아가는 거다. 간절함이 없어서 그렇다는 둥 아직 먹고살만해서 그렇다는 둥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던지. 보태주지 않을 거면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가던지.
갈수록 각박한 세상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더 곱씹는다.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었을 땐 감정의 대가마저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혹시 하는 그 작디작은 일말의 생각이 이렇게 씨앗을 틔울 줄이야. 내가 화가 많아진 건지 세상에 화낼 요소가 많아진 건진 알 수 없지만, 갈수록 사라져가는 인류애와 어떻게 해서든 자기 실속 챙기기 바쁜 치졸함과 약삭빠름을 곰같은 내가 이해하기엔 버거운 세상임은 틀림이 없다. 악한 끝은 있어도 선한 끝은 없다던 나의 당신께서 해주신 말씀을 나는 차마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살아생전 내가 베풀었던 모든 것들이 언젠간 나에게 크게 되돌아 올 것이고 혹여라도 다 돌려받지 못하면 그 모든 것들은 나의 후손에게 전해져 덕을 볼 것이라는 그 말씀이 그릇이 작은 내게는 버겁게만 들린다.
결국 담뱃갑을 꺼내들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찰칵하는 경쾌한 라이터 소리에 짜릿해진다. 우는 피에로 몰골을 하고선 골목길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아까와 또 다른 시선들이 느껴진다. 때때로 쯧쯧 혀를 차는 소리마저 들려온다. 담배를 피우는 그 5분 남짓 한 시간이 50분처럼 느껴진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겨눈 화살을 어디로 쏘아야 하는지 목적을 잃었다. 목적을 잃은 화살을 쏘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새 이미 당겨진 활시위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려온다. 담배 한 개비에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이 쌓여있던 감정들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감정이 단단하게 얼어 켜켜이 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diary/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