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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2024

20240923

by 순애_ 2024. 9. 23.

이상하게도 너는 모든 계절에 존재한다. 난 사계마다 여름을 앓고, 지독한 여름 장마가 돌아오면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 고요한 밤이면 빗소리가 괜히 더 크게 울려퍼지는 듯 해 괴로워서 불면증은 더 심해지기가 일쑤다. 나는, 너랑 있을 때면 뭐랄까. 손금을 다 풀어헤치고 다시 조합해버리고 싶다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종종 하기도 했다. 너는 봄 같은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먹먹한 여름 같다. 꽃이 잔뜩 하늘에 휘날리고 사랑의 계절이라 불리는 봄이, 마치 늘 행복할 줄만 아는 너와 가장 어울리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네가 먹먹함을 품은 푸른 여름을 닮은 것 같다.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종종 우리가 스물이었던 그 해의 여름을 떠올릴 때면 그 날은 유독 밤이 길곤 했다. 어젯밤에는 여름이 돌아오는 꿈을 꿨다. 창문을 열어보니 장마가 시작되어있는 그런 꿈. 나는 우산도 없이 그 장마 속에 뛰어들고선 한참을 서있었다. 깨고 나서 허겁지겁 내 방 블라 인드를 걷어올리고 나서야 꿈인 줄을 알았다. 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여름 속에 살고 있었다. 여름은 이미 저문 지가 오래인데, 내 마음은 여전히 스물에 머물러 만개하고 있었다. 모든 마음이 여전히 스물을 향하고 있다. 여전히 그 해의 여름을 붙잡고 있었다. 무뎌진 것이 아니라 묻어둔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한 때는 찬란하고 순수했던 마음이, 이제는 눅눅하다.

그러니까, 감히 청춘이라 부를 수 있었던 그 마음은 이제 쓸모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걸 자각하는 밤이면 괜시리 마음이 시려오곤 했다. 나, 다시는 그 때만큼 순수한 사람이 될 수 없구나. 한 때 사랑에 열정적이었던 나의 모습은 이제 나 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었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사랑을 할 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던가. 모든 신경이, 모든 마음이 여름에 집중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건 꽤나 아픈 일이다. 여름이 다시 돌아온다면 기억이 날까. 모르겠다.

너와 나누던 어느 여름밤의 대화를 나는 한 삼 개월 동안 꺼내먹곤 했다. 쉽게 흩어지고 눈 앞에 일렁이는데도 잡을 수 없는 것들은 전부 여름을 닮았다. 그리고 네가 그렇다. 요 며칠 간 장마라더니 비가 잘 내리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기려던 찰나에 지독하게도 여름 장마는 이제 시작이란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더위를 잘 탄다던데 이상하게도 너는 겨울과 가을 사이에 태어났으면서도 더위를 많이 탔다. 이상하게도. 너를 보면 누군가 방금 막 밑에서부터 꾹 눌러짠 치약의 뚜껑을 여는 것마냥, 말하고 싶지 않아도 할 말들이 줄줄이 흘러나오곤 했다. 너를 보면 꼭 그랬다.

추운 계절에 태어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반대인 더운 계절에 태어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너는 분명 여름에 태어난 사람이 아닌데 왜 그리 여름을 닮았으며 겨울에 태어난 나는 그런 너를 또 왜 이다지도 사랑하게 됐는지. 누군가를 보며 감히 계절을 떠올린 적은 없었는데 너를 보자마자 여름을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곤 했다. 너를 보다보면 너무 이상한 것 투성이다. 몇 번의 눈이 내리고 나니 이제는 정말 부정할 수가 없다. 필히, 너는 여름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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