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riting/love

우산 없는 척 할게

by 순애_ 2024. 10. 31.

얼마 전에 갑자기 비가 마구 쏟아지던 날, 그때 당신이 우산 들고 데리러 왔었잖아. 사실, 나 그때 우산 있었다. 나는 뭐든 준비해놓는 성격 탓에 늘 작은 우산까지 챙겨다니는데, 그날은 우산 없으면 데리러 온다는 당신 한마디에 괜히 덜렁거리다 빼먹은 사람처럼 굴고 싶더라. 그래서 급히 우산을 사야한다고 하는 친구에게 주고 먼저 보냈어. 어차피 나는 당신이 데리러 오고 있다고. 그리고는 가만히 기다리는데, 저 멀리 우산을 쓰고 걸음을 재촉하는 당신을 보니 너무 행복한 거 있지.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던 당신 얼굴. 아마 그때였을 거야. 당신과의 연애뿐만이 아닌 결혼까지 꿈꾸게 된 게. 단지 우산을 가져다줘서가 아니야. 늦은 밤 나를 데리러 와준 고마움 때문도 아니고. 그냥, 우산을 들고 오는 당신 표정이 나와 같아서, 나를 위해 우산을 들고 오는 거면서 마치 내가 행복을 쥐여준 듯이 웃는 당신이 예뻐서, 그래서 그러고 싶어졌어. 오래 살을 비비며 뒤엉켜 한집에 살고 싶어졌어.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나를 끌어 우산을 씌워주던 당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웃던 우리. 품에 안겨 걷는 듯했던 그날. 나는 내내 전부 행복했고. 지금 이 말을 하면서도 양쪽 입꼬리가 간지러워. 그러니까 혹시 된다면, 그래 줄 수 있다면, 다음에도 나 데리러 와줄래? 그 때도 내가 우산 없는 척할게.

그럴 때가 있다.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종종 그때 추억에 살게 되는 며칠. 시야가 흐릿해질 만큼 비가 많이 쏟아지던 날 굳이 하나의 우산으로 서로 몸을 구겨 쓰고 걸었던 기억. 노을이 지던 시간에 맞춰 달려갔던 바다. 모래사장 위에 끄적이던 유치한 단어들. 다툼 속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 종일 서로에게 안겨준 부재. 서로 상처가 될 줄 모르고 툭 던져버렸던 말들. 애틋했던 시절과 서로를 아프게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던 시절. 처음 혹은 끝. 더는 당신을 떠올리다 세면대를 붙잡고 울지도, 당신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무언가를 피하지도, 당신 이름을 부르다 새벽을 걷지도 않게 되었음에도 종종. 아주 종종 추억 속에 사는 일. 내가 많이 좋아했어. 당신을 진심으로 아주 많이 좋아했어.

'writing > lo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가 빛인 사람  (0) 2024.11.06
내가 순응한 사랑  (0) 2024.11.01
참사랑  (0) 2024.10.28
결국 또 사랑  (2) 2024.10.17
사랑스러운 것들  (1) 2024.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