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면 다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과 애정, 다정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연장선상에 있다. 이를테면 위상동형이다. 사랑에는 다정함이 수반된다. 다정하지 않은 사랑은 이제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십 대엔 불 같은 사랑을 지향했었다. 관계를 불태우고 건조하게 만드는 걸로는 도저히 모자라서 걸핏하면 서로의 생에도 뜨거운 불길을 놓기 일쑤였다. 그렇게 다 태우고 나서 까맣게 된 폐허에 서면 그제야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서로의 생에 검고 납작한 검은 얼룩을 여기저기 남겨놓는 거. 기꺼운 마음으로 검은 얼룩을 안고 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조금 다른 가치를 보게 됐다. 이제 내게 사랑이란 한 겨울에 신는 양말 같은 것. 햇볕에 잘 말린 수건 같은 것. 비가 올 때 우산을 두 개 쓰지 않는 태도 같은 것에서 기인한다. 이건 한 나물의 맛을 알게 되는 일과도 비슷하다. 보다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스물쯤 먹으면 어영부영 살아도 그런 것들을 꿰뚫는 감각이 생기기 마련이다. 굳이 서로의 생에 뜨거운 불길을 놓지 않아도 발이 시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일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거다. 초라하고 보잘것없을 때에 내가 되돌아갈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반드시 사랑일 거다.
같은 의미로 애정이 결여된 다정함 역시 내겐 다정함 없는 사랑과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적당히 다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선 이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건 책임질 생각 없는 다정함이므로 가끔 일방적인 감정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일방적인 애정과 다정함도 폭력일 수 있지만 말이다. 사랑과 다정함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곡차곡 번갈아 쌓이면서 그 사이를 견고히 다지는 성질을 가졌다. 얼마든지 거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품고서 생의 틈새마다 존재한다.
내게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날엔 끝도 없이 사랑할 수도 있었다. 종종 나보다도 더. 그래서 함부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깊어진 만큼 신중해지는 거다. 사랑은 할수록 크기를 계속 키우는 그릇 같아서, 많이 할수록 크고 깊어지기만 했다. 한 번 깊어진 것은 좀체 메워질 생각을 않는다. 덕분에 많은 것에 애정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 세상천지 온갖 것을 다 담아도 그럭저럭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의 역치가 커지는 바람에, 이제 어지간한 관계로는 그 그릇을 온전히 채우기 힘들어졌단 뜻이기도 했다. 사랑한단 말을 하고 살 일이 잘 없게 됐다. 그러니 내가 언젠가 사랑한단 말을 꺼낸다면, 그건 내가 그 순간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소모하는 말일 것이다.
무언갈 사랑하기 위해선 사랑하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을 명백히 어떤 것으로 정의내리거나, 증명하거나, 계량 할 수 있는 경계선은 없지만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별다른 기준 없이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봄이 있음을 알게 되어야 비로소 겨울이란 단어가 생기고, 밤이 있음을 알 아야 비로소 낮이란 단어가 생기는 것처럼 다정하지 않은 상태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다정함이란 단어도 성립할 수 있다. 우린 쓸쓸함을 배제하고는 결코 진정한 다정함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쓸쓸해 본 사람만이 다정할 수도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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