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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by 순애_ 2024. 8. 7.

이별의 가장 큰 책임은 만남에 있는지라, 나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에 얼마간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만나지 않으면 헤어질 일도 없다. 일어나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듯이. 평생 그 자리에 뿌리박고 서서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생에 할애된 모든 마음은 이미 다 소진했다고 여겼다. 그런 사람처럼 굴었다. 그 믿음은 과연 틀린 게 아니라, 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지냈다. 사랑. 사랑은 괴로움일 뿐이라던 애들을 많이 알고 지냈다. 처연한 낯으로 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개연성 없는 문장을 빚어내던 애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그 자리에 속하는 게 싫었다.

'이별'과 '만남'의 인과를 '마음을 저버리는 일'과 '믿음'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면, 내가 모든 만남으로부터 이별을 꽃피웠듯이, 모든 믿음으로부터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일 또한 명쾌하게 설명해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위상동형인 셈 쳐도 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를 계속 만나고, 가끔은 믿어 보고 싶단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나는 소설가니까. 겉으론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체하면서도 내심 마음 한편엔 불멸의 사랑이나 절대적 운명 같은 걸 고이 품고 있어야만 하니까.

문학은, 내가 만든 글자의 세계는, 현실의 물리학이나 역학이 좀처럼 통하지 않는 곳이라, 당신이 원한다면 봄 뒤에 다시 봄이, 그 봄 뒤에 다시 또 봄이, 여름 뒤에도 봄이, 가을 뒤에도 봄이, 2월이든 3월이든 꽃이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당장에라도 만개할 수 있는 곳이다. 벚꽃도 만개하고 개나리도 만개하고 코스모스도 만개하고 길 건너편엔 펑펑 눈도 내리고, 우린 눈 내린 청보리밭을 따라, 내부가 아주 따뜻한 기차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도 까먹고, 김 서린 차창에 검지로 글자를 적듯이, '아무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무책임한 문장을 매일, 매장마다 적어 넣을 수도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내가, 내가 만든 글자의 세계를 구태여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 일어날 수 있는 곳으로 상정했다는 것이고, 그 말인즉슨 당신은 이미 내 세계의 전부가 되어버린 거라고. 나는 종이에 적는다. 우린 만났고, 나는 당신을 믿기로 했다. 내 세계에서 만큼은, 우리의 만남과 내 맹목적 믿음은, 결코 통상적인 방향으로 자라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당신이 기차 차창에 '아무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적은 이상, 우린 아무튼 행복하게 살게 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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