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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2024

20240816

by 순애_ 2024. 8. 16.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이 있었다. 삶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나는 감히 세상의 흐름도 손아귀에 쥐고 싶어 했다. 그렇게 나는 삶이라는 게 내 뜻대로 살아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릴 적 꾸었던 꿈이 무색해지게도, 어른이 된 내가 마주한 것은 낭만의 죽음.

삶은 의지를 잃었을 때 비로소 무너진다. 한 번 되살아난 무기력은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어서. 그것들은 세포가 분열하듯 순식간에 삶을 집어삼키는 존재. 어쩌면 나태에 잠식된 삶은 혼란과 쾌락으로 가득한 하나의 미궁 같은 것. 나는 지금 그곳에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런 곳. 온갖 거짓과 합리로 점철된 그곳에 있다. 이곳은 자칫하면 나도 모르게 아늑해져서 끝내 온몸을 전부 던지게 되는, 그런 곳.

사라진다는 것은 뭘까.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못해 눈을 감고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네가 이 세상에 끝까지 남아 나를 기억해 준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난 기어코 사라진 것일까. 하지만 너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내가 살아서 숨 쉬고 있을 테고, 넌 그것을 끝까지 잊지 않아 줄텐데. 그럼에도 난 기어코 사라진 것일까. 비록 나의 몸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을 텐데.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 역시도 수많은 미래 속에서 여전히 나를 사랑할 텐데.

사는 것은 왜 이토록 고통인가. 불투명한 것들은 늘 통증을 수반한다. 무사안일주의가 드리워진 세상의 그늘 아래에서 고통을 마주하는 것은 필연적 작용이라고 했다. 통각은 분명한 실체였으니까. 인간은 태어나기를 실재하는 것만 믿는 족속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형상을 잃은 신은 인간을 버렸다. 수많은 영혼이 타락하고 퇴폐해가는 과정을 방관하는 게 당신들의 취미이지 않았던가. 구원은 신의 무기이고 원죄는 신의 방패이니, 결국 정의는 다 죽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자란 아이는 깨지기 마련이다. 안에 담긴 내용물을 감당할 수 없어서 터져버리는 박스처럼, 자라나는 뿌리들을 감당하지 못한 화분처럼.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는 누군가의 눈에는 일찍 철이 든 것처럼 보일 테지. 또 다른 누군가의 자랑과 자부심이 되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 테고. 하지만 그 아이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못 이겨 무너지고 말테다. 언제부터 본인을 숨기고 사는 게 미덕이 됐을까. 오로지 자기를 위한 삶, 그런 유토피아적 삶은 존재하지 않겠지.

신은 고했다. 절대적 진리는 신의 권능이기에 만물은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고. 결론은 세상에 영원하고 절대적인 건 없다는 거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현실은 잔인하다. 통각은 참아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파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강제적으로 성장을 촉구해야 했던 아이의 결말은 결국 하얗게 명멸하는 세계에서 눈을 감는 잔혹한 비극. 인간은 유동적이고 쉽게 변한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고정적이고 단편적이다. 그래, 애써 살아가기엔 참으로 우스운 현실이었다.

더 이상의 연명은 질병으로 치부하자. 무한한 투쟁이 익숙해진 시점부터 인간은 모두 착란 속에서 살아가니까. 우리는 서로를 겨누는 법밖에 모르지. 그렇게 인간의 감정은 퇴색해 점차 곪아가는 거지. 숨이 막혀와도 우리는 날숨을 내뱉을 줄만 알고 숨을 마시는 방법은 모른다. 헐떡이는 소리만 요란하게 경련할 뿐. 이렇게 간간이 연명하는 삶은 결국 저주이다. 극도의 고통도 지나가면 전부 쾌락이라고 했던가. 아니, 그딴 건 없었어. 고통 뒤에는 더 큰 고통만 기다려. 낭만 없는 삶은 버려. 눈물이 범람하는 삶에서는 불씨도 붙지 않으니까. 그러니 이제 고통의 윤회를 끝내자. 우리 함께 죽음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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